[독자기고] 최훈식 장수군수, ‘최고급 청자’ 출토가 말하는 장수의 역사적 시그널
최근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에 자리한 삼봉리 고분군을 발굴조사 하다가 고려시대 돌방무덤(석실분)에서 최고급의 청자가 출토되어 많은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동안 삼봉리 고분군은 가야시대 무덤군으로 알려진 유적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관심은 ‘최고급 청자’에 쏠렸지만 나는 내가 나고 자란 장수군의 역사가 범상치 않았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필자에게 있어 침령산성은 어릴적 소풍으로 자주 다니던 곳으로 동네 놀이터와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의 발굴조사를 통해 그 역사성이 밝혀져 장수군 2호 국가사적을 앞두고 있는 자랑스러운 우리군의 문화유산으로 발돋움했다.
최근 침령산성을 조사한 연구자로부터 산성 내부에서 확인되는 집수정(매몰)과 건물지(화재)는 인위적으로 폐쇄되었으며 아마도 그 시기를 고려시대 초기로 본다는 내용을 들었다.
장수군이 고대 역사문화에 있어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밝혀주는 문화유산인 대적골 철 생산유적에서 용의 발톱이 4개인 청동제 범종이 출토되었다. 이 범종은 후백제 시대의 범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확실한 시대를 알기 위해 지속적인 연구가 진행 중인 장수를 대표할 만한 유물이다.
이 유물을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범종이 누군가에 의해 훼손된 채 출토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장수군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명이 장수와 장계로 나뉘는 시점이 고려 초기이다.
위에서 언급된 일련의 역사적 사실들을 토대로 생각해 볼 때 장수지역이 역사적으로 소외되기 시작한 시점이 고려 시대 이후일 것이라는 생각에 전율을 느꼈다. 이번 최고급 청자출토는 역사용어인 미싱링크 즉, 장수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는 데 결정적인 흔적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장수지역을 직접 관리하기 위해 파견된 중앙관리의 돌방무덤과 최고급 청자가 확인됨에 따라 철저한 계획하에 장수지역 역사문화를 지우려 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확인되는 가야무덤군, 철생산유적, 봉화유적, 산성유적 등은 고대사회에 있어 장수지역이 가지는 역사문화의 탁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기(氣)를 이어받아 2덕(德) 3절(節) 5의(義)의 훌륭한 인물이 배출된 곳이 장수군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가까운 시기의 고려전기 정치가이자 문인인 김부식은 그 유명한 역사책 “삼국사기”에 우리 지역의 찬란한 역사문화를 철저하게 배제시켰다. 또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자신의 유훈인 “훈요10조”를 통해 치령산맥 이남으로서 공주강(금강) 바깥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못하도록 하명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수모에서도 장수군의 찬란한 역사문화는 지속적인 역사적 시그널을 통해 장수지역의 탁월한 역사성 알리고 있다. 얼마 전 유명한 한국사 강사의 말을 빌리자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후손이 똑똑하면 역사문화는 찬란함을 꽃피울 것이며 또한 역사는 분명 기억하는 자의 몫이라 하였다.
일련의 확인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장수군이 새롭게 도약 하는데 있어 충분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시련과 수모를 뛰어넘고 있는 장수군의 과거의 역사문화 기록들은 지역성을 뛰어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이며 이를 위해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수록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곧 개관되는 장수군 역사전시관에도 지역의 우수한 역사를 담고 있으며 이러한 노력이 반드시 꽃을 피울 거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도 장수군 행정의 수장으로서 지역의 역사문화를 알리고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힘 써보겠다는 다짐을 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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